(가정)21세기 아프리카에서의 가정생활 > 모든 것 안에서

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나눔터
- > 나눔터 >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 안에서

(가정)21세기 아프리카에서의 가정생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2-14 16:40 조회591회 댓글0건

본문

**세계CLC의 정기 간행물인 <progressio> 71번에 실린 남아프리카 공화국 CLC 회원의 나눔입니다.

 

 

21세기 아프리카에서의 가정생활

 

 

 

나의 고향

 

저는 196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소웨토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혼외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고, 저 역시 혼외자로 태어났습니다. 저를 낳았을 때 어머니의 나이는 21살이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영면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당시 제 아버지는 자신이 자녀 양육의 책임을 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손에서 컸습니다.

 

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어머니께서 아주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고, 당시 어머니는 자녀가 없었던 사촌 오빠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는 감리교인이셨습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외삼촌(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것입니다)께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셨고, 그 즈음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외삼촌과 같은 날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외삼촌과 외숙모가 제 친부모인 줄 알고 자랐습니다. 아프리카의 전통이나 문화에서는 모계 가정에서 혼외 자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로 보아서 감추려고 합니다. 이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측면도 있고, 가정의 위신을 지키려는 측면도 있습니다. 저는 16살이 되었을 때 이웃에 살던 한 아주머니가 무심코 한 얘기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저에게 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지내신다고, 방금 엄마가 마을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만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저랑 같이 사는 사람 말고 매니니 얘기를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제 언니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항상 제가 필요한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해주었습니다. 그분이 제 친엄마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베이비 붐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던 모든 것이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혼외자의 수가 너무 많아졌고,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습니다. 저는 언니의 결혼을 지켜보았고, 가톨릭 교리를 통해서 가정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제 꿈이 되었습니다. 많은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저는 혼례복을 지어놓고 낳을 아이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이 저를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미혼모가 됨

 

간략하게 말하자면, 저는 두 번의 연애를 했지만 다 잘 안 되었습니다. 두 사람과 다 성관계가 있었고 결국 두 번 다 임신을 했습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는 것은 백인들뿐이었고, 흑인이 아이를 지우려면 때론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해외에서 돌아오신 이모가 제 일을 알게 되시고, 낙태를 권유하시면서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도 하였지만 저는 낙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만났던 사람은 제가 임신했다고 말해서야 자신이 유부남인 것을 밝혔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딸을 낳고 저는 오랫동안 남자를 만나는 것을 피했습니다. 저는 유능한 교사였고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 딸에게 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당시 저를 도와주려고 어떤 사람이 양육비 청구 소송을 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소송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했습니다. 먼저 친부였던 태보는 법원 출석을 거부하고,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친자 확인 검사를 해야 했고, 결국 그가 아버지임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소송 문건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소송을 포기하고 아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우리의 삶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때 쯤, 그러니까 1995년에서 96년쯤에 저는 처음 CLC 단위 공동체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저는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이냐시오의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제가 자라왔던 본당을 비롯하여 몇몇 성당 모임에서 환영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또 다른 매력적인 남자를 만났지만 그 역시 정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서른 세 살쯤 되면 사람의 성격을 읽는 것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남자는 여자를 밝히고, 알코올 중독이 있었고,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폭행을 가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후에야 그의 진짜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공동체의 보통 여자들처럼 관계에서 어느 정도 위축되어 있긴 했지만 저를 신체적으로 폭행하고, 애써 번 수입을 갈취해가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그런 남자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고, 결국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부모로서 가정을 꾸려나가겠다고 분명히 정돈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두 남자 중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신발 한 켤레 조차 사 준 적이 없습니다. 저 혼자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렸고, 교회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제 가정을 오로지 하느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한부모 가정이면서 교회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은 배우자와 사별한 가정인 것 같습니다. 이혼한 가정들도 있지만 드문 일입니다. 미혼모 가정에 대한 지원은 아예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혼모 가정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미사 참례를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기로 선택한 신앙에서 더 소외되거나 비참해지게 될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제 공동체는 저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고, 저는 제 삶 속 상처들에 얹힌 딱지들을 조금씩 떼어나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사랑에 대해서는 완전히 외면하였고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CLC로 산다는 것만이 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제 신앙은 널뛰기하듯 오르락 내리락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한부모 가정으로 사는 것

 

제 이야기는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 있는 수많은 한부모 가정의 한 예일 뿐입니다. 저는 남아프리카 츠와나 부족에서 겪는 예만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부족의 경우는 가정 폭력을 견디며 살것인가 아니면 한부모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저와 같은 많은 여성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원조 시스템이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도는 의존성만 키워줍니다. 이런 지원은 양육비, 입양비, 고아들에 대한 지원 등의 명목으로 백인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과거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많이 수정이 되어 흑인들에게도 지원이 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10대 임신이 더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직접 지원보다는 저는 늘어나는 한부모 엄마들에게 교육 같은 자원들이 더 많이 지원되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10대들로 자신과 가족을 돌볼 수 있을만큼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 혹은 자녀들을 온전히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돈만 약간 주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악순환을 고착시킬 뿐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기

 

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을 하면서, CLC로 살아가면서 점차 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단단해졌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저는 강합니다. 저는 운좋게도 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제 아이들을 위해 기본적인 것들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제 아이들은 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저는 저처럼 10대 임신의 그물에 걸린 제 딸에게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사회복지 분야에서 직장을 갖고자 했던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자격을 갖추게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중학교 3학년인 제 아들은 과학 분야에서 일할 꿈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보통 10대 아이들의 선택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에 따라 수시로 바뀌긴 하지요.

 

그리고 또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을 지키기로 의식적인 결심을 하였고, 이것을 제가 살아가는 신념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제 딸은 복사를 했었고 제 아들은 지금 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내년에 견진 성사를 받을 예정이고, 교리 교육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더 이상 교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게 된 것이 진정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가족으로서 식사 시간에 둘러앉아 함께 기도하고, 때때로 둘러앉아 그날 일어났던 것들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런 나눔 시간을 가질 때마다 특히 아들이 불편해 하곤 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제 삶의 방식이 그들의 삶의 기반이 되고, 그들도 앞으로 CLC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지금 그들은 아직 CLC에 속했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텡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했던 대부분의 젊은 가정들이 지금 이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 CLC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밖에 없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총회는 2006년 총회였습니다. 또 우리는 최근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가장 최근에 제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의 삶에 또 다른 중요한 기둥이었고, 어머니가 안계셨다면 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CLC를 대표하여 여러 국제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외국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야 할 때 언제나 기쁘게 손주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은 집에 자기들끼리만 있습니다. 이제 제 딸이 커서 기본적인 것을 다 할 수 있거든요.

 

결론

마레사베 한나 사비마코티에 따르면 이 짧은 가족의 삶이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내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0136168번째 생일을 보낸 며칠 후 527일 월요일에 돌아가신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 삶을 살아나가려고 합니다. 제 삶에 영적 위기가 있을 때 의지하실 수 있는 부모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저의 아버지는 전통 의술을 시행하시는 분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영혼을 하느님께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저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가족과 가정 생활에 대해서 나누는 이 도전을 저에게 허락하신데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마레사베 하나 마고티

남아프리카 공화국 CLC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histian Life Community     -
희망학교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