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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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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18 11:23 조회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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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삶

-하느님의 계획과 성찰-

 

 

 

                                                                                                                                         브리안 그로간

 

(지난글에서 이어집니다.)

 

 성찰은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인 동시에 또한 흥미로운 과정이다. 성찰을 통해 어떤 난국 안에서도 무엇인가 놀라운 것을 발견해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이 사랑을 발견하고, 세세한 일상, 상징, 행동 안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은 일생이 걸리는 기쁜 작업이 된다. 성 이냐시오는 자서전에서 하느님께서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그를 가르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매우 더디게 배우는 학생들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들 깊은 내면에는 사물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14세기에 노리치의 줄리안에게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이 사건 안에서 네 주 하느님의 의향을 알고 싶으냐? 잘 기억하라.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이 뜻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이것이며, 우리가 깊이 알아갈수록 점점 사랑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의미가 되어간다.

 

성찰과 반성

우리가 이제까지 말해온 성찰은 온 생애가 걸리는 작업일 것이다. 단순하게 과거에서부터 불려오던 반성처럼 그날의 짧은 순간에 한정될 수 없다. 반성은 오히려 그날의 성찰의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반성 자체에 무리하게 기대를 걸려는 시도는 무너지게 된다. 그날의 결정은 일어난 대로 식별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는 모임, 다른 사람과의 토론, 특별한 문제들이 관련된 자료들을 개인적으로 살펴보는 것 등이 있다. 이런 모든 작업들이 그리스도인의 식별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이 작업이 하느님께서 각 상황에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셨는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기본 틀 안에서 이루어졌을 때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눈앞에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12:2) 그러므로 반성은 하느님과 떨어져 지낸 바쁜 일상 중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어떤 특정한 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던 그 날을 하느님과 함께 돌아보는 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삶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내가 택한 삶(능동적)과 내가 견뎌야 하고 겪어야 하는 삶(수동적). 이러한 범주 안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며 하느님은 이 양자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성찰할 것들은 사실상 끝이 없다. 성찰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 지혜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안전하게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또한 우리가 성삼위를 보다 기쁘게 해드리면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보다 잘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데 더 적은 노력을 하고도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성찰하는 삶 안에서 성장하는 두 가지 모형을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는 마음의 이끄심에 참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과거의 특정 사건이나 부분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양자 모두 각자가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이 일하고 계시는 소리 없는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음의 이끄심

 

 

하느님은 우리를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당신과 당신의 계획에로 이끌어가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오직 하나만은 아니다. 이 계획안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든 사건이 들어있다. “이끄심이라는 생각은 요한복음서 안에서 잘 나타나 있다. 예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12:32) 그 전에 그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이끄심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6:44) 그렇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일은 우리들을 그분들께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서 이런 이끄심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사실, 이런 마음의 이끄심으로 점점 더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 이끄심에 참여하면서 우리들은 이 이끄심에 협력하고 함께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부분적인 선율은 하느님의 우주적인 교향악 안에서 보다 더 조화를 이뤄나갈 수 있게 된다.

 

나를 이렇게 이끄시는 것 같다....”

 

여기서 이 이끄심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른 것 보다는 어느 한 쪽으로 이끌리는 것을 체험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이 글을 읽는 이유는 끌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는 중이거나, 무엇인가 우리 삶에 보다 의미를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 글을 택했다. 만약 여기까지 계속 글을 읽어왔다면 무엇인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기에 좋았거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로 부르는 마음의 이끄심의 예이며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는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삶에 이끌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 정권에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데 시간을 내겠다고 생각할 때, 평화, 기쁨, 행복, 뿌듯함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오로지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예를 들어 폭음을 하거나 별로 원하지도 않은 제품을 살 때 뭔가 그저 그렇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다른,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사람들은 마음이 메마를 때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도 기쁨을 그리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다면 공허함과 불만을 느끼게 된다. 기도할 때도 별로였지만 기도하지 않는다면 더 심각해진다.” 하느님의 이끄심은 바로 여기 있지만 우리는 쉽게 이를 놓쳐버린다. 사람들은 정의나 정직에 대한 기준을 홀로 만들어 나가는데 두려움을 느끼거나 약해지게 된다. 하지만 온 마음을 다한다면,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을 삶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삼위의 이끄심을 알아가면서 성장해 나가면 우리들은 전에는 별로 해롭지 않아 보였지만 이제는 우리 마음에서 반작용을 일으키는 다른 힘이나 끌리는 것들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충동이 뒤섞여 있다. 어떤 것은 선하지만 어떤 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충동들을 식별하고 살피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아마도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이 충동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 충동을 따른다면 과연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로 내가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가? 아니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나 자신에게만 빠지도록 이끌어가는 즉, 어두움과 소외, 동요, 확신과 내적 평화의 상실로 이끌어가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성삼위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드려야 하며 이 지혜 안에서 성삼위가 이끄시는 황금 밧줄을 잡을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에서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두터운 쇠사슬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 황금 밧줄과 절거덕거리는 두터운 쇠사슬이라는 비유를 든 것은 플라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쇠사슬은 우리들을 자신의 삶에만 갇혀 있게 만드는 몇 가지 기본적이고 강한 충동일 수 있다. 따라서 힘이 빠질 때 우리는 이 충동을 버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구속사를 써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들은 아마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완전해야 하거나 항상 남을 도와주고, 성공하고, 무엇인가 특별하고, 현명하고, 의무감이 강하며, 힘이 세거나 굳건하게 서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충동들은 모두 절거덕거리는 두터운 쇠사슬이다. 황금 밧줄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다고 속삭이시는 끊임없고 부드러운 노래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선이시기에 완전한 신뢰를 받으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은 결국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상과 잘못된 충동들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하며, 사랑 그 자체이시자 선이신 성삼위의 초대와 약속에 동참해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이끌 것이다

 

우리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작업은 선택적인 이끄심이 아니다. 성삼위는 대부분이 잘 알아차리고 있지 못하다 해도 모두가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단순히 하느님이 내 삶 안에서 이끌고 계시는 데만 민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 가족이든 모임이든 성당이든 이웃이든, 사업이든, 종교 공동체이든 간에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에 민감해야 한다. 전체 공동체는 쉽게 자기 공동체의 목적에만 몰두하여 보다 큰 공동체의 선익, 특별히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진정한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개인처럼 공동체도 영광스런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죄성을 지니고 있으며 편견에 사로잡혀있다. 따라서 성삼위의 계획안에서 공동체의 역할과 의미를 공동 성찰할 수 있는 방편이 필요하다. 이 방편들이 공동체를 보다 성장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어야 하며,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민감한 사랑을 가지고 불행한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응답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입장은 반드시 자기 관심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삼위가 이 관심의 전반에 계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공동체 안에서는 한 두 사람만이 이런 보다 폭넓은 관심사를 갖게 된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럴 때 아주 쉽게 절망하게 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하느님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고, 성삼위가 다른 회원들의 마음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그들이 일상에 갇힌 생활에서 벗어나 세상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심을 알게 된다. 이 시점에서는 열망으로 가득 찬 서약과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인내가 적절하게 통합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쉴 새 없이 이 세상에서 악을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단기간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을 받을 수 없다. 많은 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고한 대가를 보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향한 투쟁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듯이 구조적인 악이 선한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왜 계속 일을 해나가야 하는가? 바로 하느님 당신께서 이 일을 계속하고 계시고, 악이 이 세상 안에 만들어놓은 것을 온전히 다시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 역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성과를 거두는 것은 사랑 안에서의 영원한 자질이나 씨앗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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